[BEHIND STAFF INTERVIEW] 두 번째 주인공. 김현태 골키퍼 코치
이번 7월. 저희 UTD기자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우리 인천 유나이티드를 위해 고생하시는 BEHIND STAFF 분들을 만나보는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질문은 UTD기자단의 페이스북 계정인 ‘IUFC_PRESS'를 통해 응모를 받은 내용을 참고하여 구성하였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김현태 코치님과의 인터뷰 내용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김현태 코치 프로필
- 생년월일 : 1965.05.01
- 출신교 : 영등포공고-고려대
- 선수경력 : 1984 럭키 금성 입단 / 1984-1991 럭키 금성 / 통산 114경기 150실점)
- 지도자경력 : 1992-1998 안양 LG 코치 / 1998-2000 올림픽 대표팀, 아시안컵 대표팀 코치 / 2000-2002 월드컵 대표팀 코치 / 2003 안양LG 코치 / 2004-2007 부천SK 수석코치 / 2007-2010 월드컵 대표팀 코치 / 2010-2011 아시안컵 대표팀 코치 / 2012~현재 인천 유나이티드 코치
다음은 김현태 코치와의 일문일답.
- 김현태 코치님, 안녕하세요. 먼저 저희 UTD기자단과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장 먼저 인천 유나이티드 팬 여러분께 인사 한 번 해주시지요.
= 인천 유나이티드를 성원해주시고 응원해주는 팬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현태 코치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제가 인천으로 온 뒤에 여러분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지면으로나마 제대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 어디에서든 늘 우리 선수들 뒤에서 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가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에 열심히 답변하겠습니다.
-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질문은 팬 여러분께서 직접 보내주셨습니다. 준비되셨나요?
= (긁적이며) 오, 질문이 꽤 많네요? 다 늙은 저한테 뭐 이렇게 궁금하신 게 많으신지.(웃음) 뭐,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인터뷰 시작하시죠.
- 가장 먼저 코치님의 축구 인생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 제가 축구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몸집이 또래보다 좀 컸습니다. 제가 체격도 좋고 달리기도 빨라서 처음에는 육상을 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1학년 때 반장이라서 조회 시간에 맨 앞에 서 있는데 체육주임 선생님께서 대뜸 ‘너 축구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거 에요. 축구부 애들이 운동하는 걸 보면 너무 힘들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관심 없다고 했죠. 그러다가 반 대항 축구대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공격수를 했는데 골도 많이 넣었어요. 그랬더니 다시 그 선생님께서 축구하라고 하셔서 ‘아,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축구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죠.
-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축구를 처음에는 부모님 몰래 했어요. 유니폼도 웬만하면 학교에서 입고 직접 손빨래해서 교실에 널어 말려 입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한 6개월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머니께 걸리게 된 계기가 그 당시 도시락을 먹었거든요. 점점 갈수록 제가 먹는 양이 늘었나 봐요. 어머니가 눈치가 백단이셨거든요.(웃음) 그렇게 축구를 배우고 있다고 이실직고하게 되었죠. 감사하게도 제 의견을 존중해주셔서 따로 반대하시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시게 됩니다. 그 당시 연세대와 함께 축구 명문으로 불리는 학교에 입학하시게 되었는데, 그 당시 대학교 진학 과정과 일화를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 고려대학교는 뭐 열심히 하다 보니 가게 된 것 같고요. 제가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 주전 자리를 뺏기지 않았어요. 제가 있으니까 학교에서 골키퍼를 받지도 않았었죠. 심지어 제 1년 선배는 저가 온 이후로 경기에 못 나가니까 중간에 축구를 그만 두기도 했습니다. 연세대와 정기전에서도 4년간 무패였고,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활약을 보시고 국가 대표팀에서도 콜이 왔는데 학교에서 골키퍼가 없으니까 안 보내줬었죠.(웃음)
- 와,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4년간 무패 그리고 무실점. 이건 엄청난 기록인 것 같습니다. 특히 동문들에게 큰 환호를 받으셨을 것 같네요. 학교를 졸업하고 럭키 금성에 입단하셨습니다. 프로로 가는 과정도 살짝 소개 부탁드립니다.
= 제가 졸업했던 해가 83년도였는데 그때 마침 막 프로리그가 생겼어요. 울산과 럭키 금성이 창단했는데 두 군데 모두에서 콜이 왔습니다. 그 당시 럭키 금성 사장님이 고려대 선배님이셔서 선택할 겨를이 없었죠. 그렇게 럭키 금성으로 팀을 결정하게 된 거에요.
- 줄곧 럭키 금성(現 FC서울)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명 클럽의 레전드로 큰 사랑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 혹시 이적을 생각하시지는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면요?
= 글쎄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되어있지 못했어요. 뭐 특별히 이유가 있기 보다는 그냥 럭키 금성이라는 팀이랑 잘 맞았고, 또 팀에서 배려도 많이 해줬기 때문에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현역 생활을 잘 이어가시던 중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제가 은퇴를 좀 일찍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32세였으니까 지금이라면 뭐 한창 날라다닐 때였죠. 당시 팀 코칭스태프가 고재욱 감독님, 정해성 1군 코치, 박항서 2군 코치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정해성 코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입원과 치료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떠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고재욱 감독님께서 ‘야, 현태야. 네가 임시로 선수 겸 코치 역할을 좀 해줘라.’라고 하셨습니다. 감독님이 시키시는 데 별수 있나요. 그렇게 6개월을 선수 겸 코치로 생활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팀에 매니저가 따로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운동장 섭외, 경기 분석, 선수 개개인 평가 등 모든 것을 코치가 다 했어요. 정말 밤을 새워가면서 일을 하는데 운동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은퇴를 하게 된 겁니다.
- 코치님의 선수 시절 기록을 살펴보던 중 1991년도를 끝으로 기록이 없다가 1996년도에 다시 선수로 등록이 된 바가 있다고 확인이 됩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 이것도 재밌는 일화인데요.(웃음) 그 당시 럭키 금성 팀에 후보 골키퍼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회를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결국에는 후보 선수로 저를 등록만 해놓은 거죠. 아마 출전 기록은 없을 거 에요. 말 그대로 정말 잠시 이름만 올렸던 것뿐입니다.
- 마찬가지로 기록을 살펴보니 선수 생활을 하시면서 경고와 퇴장을 각각 딱 한 번씩만 받으셨더군요. 그중에서도 1987년 8월 15일 대전 한밭 운동장에서 펼쳐진 유공과의 경기에서 받은 프로 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퇴장 장면. 기억나시나요?
= 기억나죠. 그때 경기장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땅이 질퍽거리고 물이 고여 경기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를 못했죠. 유공의 공격을 제가 몸을 던지면서 막았는데 달려오던 유공 정종수 선수가 그대로 제 종아리에 태클을 가했습니다. 정말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죠. (상처 부위를 보여주며) 보세요, 아직도 상처가 있어요. 사실 정종수 선수가 제 대학 동기라 둘도 없는 친구였죠. 근데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달려가서 그 친구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어요. 그 친구는 제 주먹에 이가 부러졌었죠. 그렇게 주심이 동반 퇴장을 주더라고요. 지금 와서는 다 추억이죠. 서로 그때 이야기만 하면 호탕하게 웃어요.
- 은퇴 후에도 선수 생활과 마찬가지로 안양 LG팀에서 오랜 시간 코치 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글쎄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 함께 했던 고재욱 감독님이 1992년도에 나가시고 신임 감독으로 조영증 감독님이 오셨어요. 감사하게도 조 감독님께서 계속해서 함께 일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다시 안양 LG에서 일하게 되었죠.
- 아, 그러시군요. 조영증 감독님이 물러나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 사실 그때는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팀을 나왔었어요. 그리고 심판 자격증 교육을 받았었죠. 어느 날 문득 ‘아, 어떤 상황을 가지고 내가 지도자 측면에서 봤을 때랑 심판의 측면에서 봤을 때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심판의 입장도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격증은 2급까지 취득했죠.
- 심판 자격증까지 따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근데 코치님의 이력을 살펴보면 1998년까지 안양 LG 코치로 등록이 되어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 팀에서 나와 그렇게 쉬고 있는데 허정무 감독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감독님께서 ‘이번에 전남 감독으로 가게 되었는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셨죠. 그러던 찰나에 안양 LG 구단에서 이번에 새로운 감독으로 박병주 감독이 오는데 계속해서 같이 일을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래도 친정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또 1998년까지 안양 LG에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 1998년 드디어 새로운 둥지로 떠나셨습니다. 그 무대는 올림픽 대표팀 코치이셨는데요. 앞서 제가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오랜 시간 정든 클럽을 떠나기도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당시 둥지를 옮기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해 한 번 소개해주세요.
= 그렇죠,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기에 섭섭함도 있었죠. 하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님이 허정무 감독님이셨는데 저에게 함께하자는 뜻을 다시 한 번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올림픽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하게 된 것이죠. 안양 LG 구단에서도 다른 클럽 팀이 아닌 대표팀 지도자니까 쿨하게 보내주셨습니다. 가서 많이 배우고 돌아오라고 해주셨죠.
- 대표팀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첫 대회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 2승 1패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에도 아쉽게 운이 따르지 않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 당시 스페인, 모로코, 칠레와 같은 조였는데 우리가 2승 1패를 기록했습니다. 근데 공교롭게도 4팀 모두가 2승 1패를 거둔 거죠. 사실 국제 대회에서 조별 예선 2승이면 무조건 토너먼트로 진출하는 것인데 운이 정말 안 따라줬죠. 그래도 감사하게도 많은 국민이 선수단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줬습니다.
- 그리고 코치님께서는 곧바로 2002년 월드컵 일명 ‘히딩크호’로 자리를 옮겨서 다시 일하시게 됩니다. 당시 국내 코치진이 박항서, 정해성, 최진한 그리고 김현태 코치님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가요? 모두 럭키 금성 출신 지도자였습니다. 어떠셨나요?
= 일단 편안했죠. 아무래도 럭키 금성에서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사람들끼리 있었으니 불화는 전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최진한 감독은 당시 정식 코치가 아니라 그저 팀 파트너 정도의 역할이었어요.(웃음) 최 감독이 박항서 감독님이랑 고향 선후배 사이거든요. 당시 최 감독이 박 감독님께 ‘대표팀에 들어가서 공부를 좀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박 감독이 히딩크 감독한테 허락을 받아서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죠.
- 아, 그랬군요. 아무튼 히딩크 감독은 온 국민에게 큰 선물을 준 인물이죠. 그 거짓말 같았던 역사의 순간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코치님이십니다. 처음 대표팀이 소집되는 순간 그 정도까지 성적을 내리라 예상을 하셨나요?
= 제 예상이요? 솔직히 1승이었죠. 당시 조 편성이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이었는데 정말 쟁쟁한 팀들이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우리는 여기서 1승만 해도 성공한 거다. 뭐 아주 잘해야 16강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결과가 재밌게 나타났죠?(웃음)
- 히딩크 감독은 처음에 전술 훈련이 아닌 체력 향상을 위한 혹독한 지옥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피폐한 학원 축구에 젖어있던 한국 축구계에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같은데요. 히딩크 감독의 지도 방향에 대해 코치님의 솔직한 생각은 어떠셨나요?
=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죠. 히딩크 감독은 정말 과학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의 체력을 향상시켰어요. 일명 셔틀런이라고 하죠. 체력 운동을 시키는 데 정말 치밀한 프로그램으로 데이터화해서 선수별로 체력 정도, 회복 속도 등 다양한 부분을 체크했었죠.
- 그 당시 체력 훈련이 본선 무대에서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체력 훈련 이외에 전술이나 다른 부분은 어떤 훈련을 했는지 살짝만 소개 부탁드립니다.
= 히딩크 감독은 항상 운동할 때마다 운동장에 물을 뿌렸어요. 운동장이 미끄러우면 자연스럽게 공의 속도가 빨라졌죠. 그런 환경 속에서 패스와 볼 컨트롤 훈련만 계속 시켰습니다. 당시 저는 사실 ‘저런 기초적인 훈련을 대표팀 선수들에게 왜 시키지?’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선수만의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날렵함을 기르기 위한 히딩크 감독의 깊은 생각이었죠. 제가 말씀드릴 것은 많지만 이렇게 간단히만 소개해 드려도 히딩크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시겠죠?(웃음)
- 네, 충분히 알겠습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와 체코에게 0-5로 지는 등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며 온 국민에게 찬물을 끼얹고 맙니다. 그 당시 팀 분위기가 솔직히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어땠나요?
= 성적표는 참담했죠. 0-5 패배가 두 번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 대회를 처음부터 우승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선수들을 길들이기 위한 시험무대로 생각했어요. 선수들이 자기 관리를 못 하면 팀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스스로 깨닫게 했던 대회였죠.
-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기 관리를 못 하면 팀에 해를 끼친다는 부분을 어떻게 깨우치게 지도했나요?
= 한국 선수들은 경기 중에 부딪히면 뒹굴면서 닥터를 찾잖아요. 그 부분을 가장 먼저 지적했어요. 한 번은 이동국 선수가 다쳐서 그라운드에 누워있어서 의무진이 들어갈 준비를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의무진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아니, 선수가 아프다는데 저 양반이 왜 저러지?’ 싶었어요. 알고 보니 선수 본인이 아프다고 누워 있음으로써 인플레이 상황 시 나머지 10명의 선수가 어떤 고생을 하는지 느끼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죠. 또 한 번은 설기현 선수가 배탈이 나서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히딩크 감독은 (설)기현이를 투입했죠. 히딩크 감독은 이런식으로 선수 본인이 자기 몸 관리를 못 하면 팀에 어떻게 해를 끼치는지 몸소 느끼게 했습니다.
- 당시 한국 대표팀은 잘해야 1승 혹은 16강일 것이라는 코치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4강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 당시 생생한 분위기를 한 번 소개해주시죠.
= 일단 홈에서 열린 월드컵이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어요. 여기서 우리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포기하는 모습은 보이지 말자고 했었죠. 역사의 시발점이 된 것은 대회 직전 가진 잉글랜드와 프랑스전이었습니다. 당시 선수들이 직접 유럽 강호와 부딪혀보며 ‘어라? 유럽이라고 별거 없네? 할 만하네.’라고 느꼈던 거죠. 그렇게 선수들이 자신감을 느끼고 본선에 가서 폴란드를 꺾고, 미국과 비기고, 포르투갈을 이기면서 조 1위로 당당히 16강 진출에 성공했었죠.
- 조 1위로 16강 진출 정말 엄청난 업적이었습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확히 그 이야기가 나온 시점이 언제인가요?
=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뒀을 때였습니다. 당시 사실 선수들이 ‘우리는 16강만 갔어도 대단한 거야. 한국이 이탈리아를 어떻게 이겨. 말도 안 돼.’라는 마음가짐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있었어요. 거기에 라이벌 일본이 8강 진출에 실패하고 이미 우리 선수들에게는 병역 특례가 확정된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선수들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박수를 받겠거니 생각했던 겁니다. 그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이 경기 전 미팅을 요청하더라고요. 평소에 히딩크 감독이 미팅을 잘 안 하던 사람이기에 모두가 의아해했죠. 그때 히딩크 감독이 ‘너희는 여기서 만족하는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왜 우리가 이탈리아를 못이길 것이라 생각하느냐. 너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강하다. 끝까지 싸워 이겨보자.’라고 짧고 강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어요. 순간 라커룸 분위기가 숙연해지면서 이상한 기운이 흐르더라고요. 잠시나마 흐트러졌던 선수들의 전투력을 다시 끌어올렸던 히딩크 감독의 신의 한 수였던 것이죠.
- 그 당시 23명의 최종 엔트리가 선정되었을 때의 과정에 대해 궁금합니다. 이동국, 고종수, 김용대 등 당대 유망주들이 대거 제외되고 황선홍, 최용수 등 노장이 들어가며 말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비화를 살짝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 (이)동국이는 사실 아깝게 탈락했죠. 당시 최종 엔트리 공격수에 최용수, 황선홍, 안정환, 설기현 선수가 뽑혔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4명 모두 각각 스타일이 다르거든요? 히딩크 감독이 상대 팀마다 각기 다른 공격 전술을 구성하겠다는 생각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이)동국이는 (황)선홍이 스타일과 겹쳐서 안타깝게도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죠. 사실 저는 (최)은성이보다 (김)용대를 추천했었어요. 그랬더니 히딩크 감독이 이유를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했죠. 그러자 히딩크 감독이 다시 ‘이보시오, 김 코치. 미래의 일을 다음 코치가 책임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현재를 책임져야 한다.’라고 되묻더라고요. 그때 크게 깨달았죠.
- 월드컵 4강 신화. 하루하루가 그냥 꿈같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이셨나요?
=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초반에 (안)정환이가 페널티킥을 놓치고,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실점하고 계속해서 끌려갔잖아요. 경기가 막바지로 향할수록 상대의 난폭하고 지저분한 플레이가 난무했지만,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투지를 발휘해줬습니다. 그리고 후반 막판 기적 같은 (설)기현이의 동점 골이 터졌고, 연장전에 가서 (안)정환이가 골든 골을 넣는데 정말 하늘이 노래지면서 우리가 해냈다는 생각에 기뻐했던 기억이 나요. 말 그대로 불가능을 현실로 바꾼 경기였기에 가장 기억에 남죠.
- 8강전에서도 강호 스페인을 만나 연장 접전 후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거두고 4강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준결승전에서 독일에 패하며 결승행이 좌절되었는데요. 그 당시 소감도 한번 말씀해주시죠.
= 정말 아쉬웠죠.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결승도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16강전, 8강전 연이어서 연장 혈투를 펼친 끝에 선수들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죠. 사실 당시 유럽 팀 중에서 독일이 약체로 뽑혔었어요. 당시 우리가 이탈리아도 이기고 스페인도 이겼는데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경기력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결국엔 체력이 발목을 잡았죠. 이민성, 이천수, 차두리 등 기존에 뛰지 못했던 선수들로 선발진을 구성했는데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고요. 아마 당시에 멤버만 제대로 나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코치님은 월드컵 이후 부산 아시안게임까지 대표팀 코칭스태프 자리를 지키신 뒤 다시 친정팀인 안양LG 골키퍼 코치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부천SK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요. 그 당시 이야기도 살짝 부탁드립니다.
= 대표팀과 계약을 마쳤는데 조광래 감독님께서 함께 하자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심지어 저를 위해서 기존에 있던 이춘석 수석코치를 내보내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별수 있나요. 바로 안양으로 가서 1년간 일을 했죠. 그런데 2004년에 정해성 감독님이 전화가 와서 ‘현태야, 내가 이번에 부천 감독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번 도와주라.’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혼란스러웠죠. 조광래 감독님도 저와 계속해서 가자고 하셨는데 거기에 절친한 선배인 정해성 감독님까지 같은 말을 하니 미칠 노릇이었죠. 그때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끊었던 담배도 피웠어요.(웃음) 정말 긴 고민 끝에 ‘선배가 도와달라는데 가서 도와주자.’라고 결론을 내렸고 조광래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부천으로 둥지를 옮기게 되었죠.
- 그로부터 또 약 5년의 세월이 흘러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다시 자리를 옮기시게 됩니다. 예전 올림픽 대표팀에서 함께 일한 바 있는 허정무 감독과의 재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정해성 감독도 함께 자리를 옮겼는데요. 그 계기와 뒷이야기도 궁금합니다.
= 허 감독님께서 대표팀을 맡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전화를 드렸어요. 당시 저는 제주에 있었죠. 그랬더니 허 감독님께서 ‘언제 한번 봐야지? 서울로 언제 올라 오냐?’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다음 주에 마침 (김)남일이 결혼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뵙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죠. 그리고 서울 결혼식장에서 허 감독님을 만났는데 기자들이 많다 보니 집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눈치를 챘죠.(웃음) 아니나 다를까 ‘내가 왜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지 알겠지? 대표팀에서 같이 일하자.’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전 그 당시 제주와 계약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죠. 허 감독님은 그건 김호곤 전무(現 울산 감독)에게 일 처리를 부탁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그렇게 다시 대표팀에 가게 되었죠.
- 허정무호의 출발도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력이 갖춰지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무패행진을 비롯하여 최종 예선도 조 1위로 가뿐히 통과했습니다. 그 당시 가장 큰 고비가 되는 경기가 사우디 원정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대표팀 어땠나요?
= 맞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사우디에서 32년 만에 승리를 거뒀을 거 에요. 그 당시 실점 위기도 정말 많았는데 이상하게 우리한테 운이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이 사우디, 이란, 북한, UAE 정말 만만치 않은 팀 사이에서 조별예선을 1위로 통과했으니 말 다했죠. 경기력도 갈수록 좋아졌고요.
- 월드컵을 앞두고 함께 마무리 훈련을 했던 이근호, 구자철, 신형민, 곽태휘 선수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한 상태에서 이 선수들을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때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 남아공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전지훈련을 했습니다. 당시 벨라루스와 평가전을 했는데 그때 (이)근호와 (신)형민이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어요. 하지만 경기력이 너무 나빴었죠. 이후 코칭스태프끼리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결국엔 이근호, 신형민, 구자철 선수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죠. (곽)태휘는 본선에 가는 거였는데 마지막에 다쳐서 (강)민수로 대체가 되었고요. 아무튼, 이 선수들을 한국으로 보내는데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이)근호가 그렇게 펑펑 울었어요. 허 감독님도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죠. 그때 처음으로 ‘아, 감독이라는 것이 어렵구나.’라는 것을 느꼈었죠.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허정무호는 결국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신화를 이룩합니다. 정말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순간을 또 한 번 함께 하셨는데 어떠셨나요?
= 복 받았다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 정해성 선배가 저한테 ‘남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월드컵 16강을 우리는 두 번이나 경험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딨겠냐.’라고 했었죠. 그저 감사할 뿐이죠. 그런 영광을 또 경험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 하지만 아쉽게도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통한의 패배를 당하며 8강 진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승리했다면 가나를 만나 또 한 번의 4강 신화를 이룰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많이 아쉬우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 정말 운이 너무 안 따라줬던 것 같습니다. 선제 골과 역전 골을 실점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모두 이상하게 들어갔거든요. 마지막에 (이)동국이의 슈팅이 골문 앞에서 멈추기도 했고요. 거기서 ‘아, 우리의 운은 여기까지 인가보다.’ 싶더라고요. 만약에 이겼다면 8강전에서 가나랑 붙었을 텐데 해볼 만했을 거 에요. 또 한 번 4강 신화를 이룰 수도 있었겠죠.(웃음)
- 이후 허정무 감독님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김현태 코치님은 대표팀에 남아 후임 조광래 감독과 계속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조광래 감독은 일명 만화축구로 불리는 빠른 패스에 의한 축구를 추구했는데요. 아시안컵에서도 일본에 아쉽게 지며 3위에 머물렀습니다.
= 사실 허정무 감독님을 따라 대표팀 자리에서 물러나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유럽으로 홈스테이까지 알아본 상태였죠. 그런데 조광래 감독님이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예전에 안양 시절에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남았던 거 에요. 아시안컵에서도 정말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잘 나가다가 일본에 막혀 준결승에서 좌절을 맛봤잖아요? 라이벌 일본에 막혔다는 것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분하고 많이 아쉬웠죠.
- 민감한 부분입니다만 조광래 감독이 경질을 당하면서 모든 코칭스태프가 뜻을 함께하며 물러나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축구협회와 잔여 연봉 지급 등과 관련하여 실랑이가 있었다고 알려졌는데요. 어떤 상황인지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 조광래 감독님이 정말 열심히 하셨는데 불명예스럽게 경질되셨잖아요. 그때 제가 후배 (박)태하, (서)정원이한테 ‘원칙대로라면 너희도 잔여 임금을 받는 게 맞다. 하지만 너희는 언젠가 대표팀에서 일할 인재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축구협회와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얼굴 붉히면 너희의 앞길이 막힐 수가 있다. 너희가 또 각각 서울과 수원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냥 좋게 넘어가자.’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조광래 감독님과 가마 코치가 끝까지 잔여 임금을 가지고 씨름을 했잖아요. 그냥 좋게 넘어가려 했던 저희로서는 난처했죠. 그래서 한 발짝 물러나서 가만히 있었어요. 그게 다에요.
- 휴식 없이 정말 수십 년간 축구와 함께 하셨기에 잠시 쉴 만도 했을 것 같은데 곧바로 인천 유나이티드 골키퍼 코치로 오시게 됩니다. 당시 목포 축구센터에서 모습을 뵈었는데 코치님께서는 기자들에게 ‘허정무 감독님을 도와드려야죠.’라고 말씀하시면서 팀에 합류를 기정사실화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허정무 감독의 부탁에 오시게 된 것인가요?
= 당시 허정무 감독님이 지금의 김봉길 감독을 우리 집까지 보낼 정도로 저에게 엄청난 러브콜을 보냈어요. 저는 계속해서 고사했죠. 그러다가 2012년 1월이었죠. 감독님께 오랜만에 인사도 드리고 선수를 한 명 소개해드리기 위해 인천 선수단이 훈련 중인 목포에 갔어요.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하필 기자 분들이 오신 미디어 데이였던 것이죠. 저는 순간 속으로 ‘뭐지? 이게 다 감독님이 계산하신 행동이신가?’ 싶었죠.(웃음) 기자들이 저를 보고 달려와서 둘러쌓고 있는데 옆에서 허 감독님이 ‘인천으로 온다고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거기다대고 뭐라고 하겠어요. 에이 모르겠다 싶으면서 ‘허 감독님 도와드려야죠.’라고 말하고 인천으로 오게 되었죠. 정말 재밌는 에피소드이지 않나요?(웃음)
- 우여곡절 끝에 코치님께서 그렇게 인천 유나이티드에 오시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막 후 2개월 만에 허정무 감독님이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를 했습니다. 그 당시 팀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었다고 알려졌습니다. 항간에는 김현태 코치님도 허정무 감독을 따라 팀을 나갈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맞습니까? (Dc Shin)
= 예, 맞습니다. 정말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면서 어리둥절했어요. 허 감독님을 도와드리러 왔는데 불쑥 팀을 떠나시니까 붕 뜬 기분이었죠. 처음에는 저도 따라나가려고 했어요. 그렇다가도 저까지 팀을 떠나게 되면 말이 많이 나올 것 같더라고요. 허 감독님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김 코치는 인천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팀도 너무 어려웠고, 후배 김봉길 감독도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는 모습에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비우고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에 인천에 남기로 했습니다.
- 한참 후배인 김봉길 감독과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 김봉길 감독이 감독 대행을 맡으면서 정말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당시 힘들어하던 김 감독에게 축구계의 선배로서 더 나아가 인생의 선배로서 어떤 말을 해주셨나요?
= 김 감독에게 ‘내가 선배라고 해서 어려워하지 말고 네 소신대로 해라. 기회는 언젠가 분명히 오니까 성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하나씩 해나가자.’고 했죠. 제가 김 감독 입장이어도 코치로 선배가 있는데 안 불편하겠습니까? 김봉길 감독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오늘날 훌륭한 지도자로 우뚝 선 것이죠.
- 강등권에서 헤매던 인천은 시즌 중반부터 거짓말 같은 돌풍을 일으키며 후반기에 19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반전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김봉길 감독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죠. 정말 선수들에게 자율적으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편하게 해줬어요. 선수들도 점차 김 감독을 신뢰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김)남일이와 (설)기현이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 두 선수가 워낙 팀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크거든요. 정말 모든 팀원이 하나로 뭉치니 살아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5연승도 하고 후반기에는 19경기 무패행진도 했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올 시즌. 마찬가지로 지난 시즌의 기세를 몰아 지속해서 상위권을 형성하며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 시즌 코치님이 생각하시는 최종 순위는 몇 위인가요?
= 일단은 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7위 안에 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이 3위, 4위지 승점이 상당히 맞물려 있는 상황이거든요. 한 경기, 두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크게 요동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전북, 울산, 서울 등 강팀을 만나기 전에 약팀과의 대결에서 승점을 쌓아놓아야 편하게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렇지 못한다면 힘들어지겠지요.
- 인천에 오기 전 제 3자의 측면에서 본 인천과 인천에 들어온 후 팀의 일원으로써 본 인천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고다솔/조아람)
=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있을 때 인천 경기력을 보면 인천만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래도 한계가 있다고 느껴졌죠. 직접 인천에 와서 느끼는 점은 정말 한 지붕 가족 같다는 점이에요. 형편이 어려운 시민구단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느꼈던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비슷한 것 같아요.
- 죄송하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포스를 갖고 계십니다. 사인이나 사진요청하면 혼날 거 같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Dc Shin)
= 그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래도 막 험악하고 무서운 사람은 아니거든요. 선수들한테도 훈련할 때는 강하게 해도 평소에는 농담도 많이 하고 나름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여담으로 저희 집사람 친구들도 저를 처음에 상당히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제가 머리를 기르고, 파마하는 이유가 조금이라도 이미지를 부드러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가까이 다가와 주세요. 팬 여러분을 절대 헤치지 않습니다.(웃음)
- 대표팀 코치를 오랜 시간 동안 하시면서 이운재, 김병지, 정성룡 등 최고의 골키퍼들을 모두 지도하셨기에 저는 김현태 코치님이 현재 한국 골키퍼계의 대부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 선수마다 각각 특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세 선수 모두 정말 훌륭한 선수들이죠. 가장 먼저 (이)운재는 일단 안정감이 있잖아요. 안방마님처럼 골문을 장악하는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캐칭력도 가장 뛰어났고요. 하지만 순발력 면에서 다소 아쉬웠죠. (김)병지는 반면 순발력이나 스피드면에서 뛰어났지만, 안정감에서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까지도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철저한 자기 관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인데 그걸 해내고 있으니 대견스럽죠. 마지막으로 (정)성룡이는 지금 대표팀 수문장이잖아요. 남들은 모르겠지만, (정)성룡이가 경기 감각이나 민첩함 그리고 블로킹 등 정말 여러 방면에서 기존 선수들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능력을 지닌 선수입니다. 그러니 대표팀에서 계속해서 중용을 받는 거죠.
- 대표팀에 있으면서 박지성, 이영표, 이청용 등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평소 그 선수들에게 연락은 자주 오나요? 특히나 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박지성 선수일 것 같습니다. 인간 박지성의 모습 어떤가요?
= 전화는 가끔 오고 문자는 자주 오죠. (박)지성이, (이)영표, (이)청용이, (기)성용이 등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잊지 않고 안부 연락을 해줍니다. 스승으로서는 너무 고맙고 행복하죠. 특히 (박)지성이는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서 ‘선생님, 요즘 인천 잘나가네요?’라고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는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연애도 하고 얼굴이 좀 편 것 같더라고요?(웃음)
- 민감한 부분입니다. 이번에 기성용 선수가 SNS를 통해 최강희 전 감독을 비하하는 항명 글을 올려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기성용 선수는 코치님이 오랜 시간 동안 옆에서 지도했던 선수 중 한 명인데요. 누구보다 매우 안타까우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는지요?
= 많이 안타까웠죠. 요즘 선수들이 SNS를 통해 팬과 소통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쉬운 거죠. 이번 일도 만약 (기)성용이가 일반인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 공인이기 때문에 일이 커졌잖아요. (기)성용이 스스로 크게 뉘우쳤을 거로 생각해요. 본인이 앞으로 축구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 성숙해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고 있고요.
- 최근 U-20 이창근 골키퍼의 활약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혹시 그 선수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나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나요?
= 정말 잘하더라고요.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이번에 대회 중계방송을 보면서 이창근 선수를 유심히 봤습니다. 상당히 좋은 기량을 지닌 것 같더라고요. 제가 직접 가르쳐보지는 못했지만 감이 있잖아요. 그 선수를 보면서 ‘아, 정성룡의 후계자로 충분한 가능성이 보인다.’라고 느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위치에서 절대 만족하지 말고 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전해주고 싶네요.
- 현재 인천의 골키퍼는 권정혁 선수와 조수혁 선수가 지키고 있습니다. 코치님이 생각하시는 두 선수의 장단점은 각각 무엇이 있을까요? (손주영)
= 상반된 장,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일단 (권)정혁이는 침착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민첩성이나 순발력 면에서 떨어지죠. 반면에 (조)수혁이는 순발력이나 센스면에서 좋지만 경기에 많이 나서지 못하다보니 실전 감각이 떨어져있는 점이 최대 단점이죠. 하지만 두 선수 모두 정말 많이 발전했어요. 서로 선의의 경쟁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봅니다.(웃음)
- 경기 전 워밍업 하실 때 슈팅 날리시면서 골키퍼 연습을 시키실 때 보면 슈팅력이 대단하시더군요.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라덕수)
= 이런 부분도 유심히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남들이 보기에 골키퍼 훈련은 그냥 대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항상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단계별로 진행하고 있죠. 제가 슈팅력이 떨어지면 실전에서 전혀 쓸모가 없어져요. 그래서 항상 훈련할 때 공을 차면서 현역 선수만큼 강하게 슈팅을 때리죠. 골키퍼 코치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이에요. 그래서 얼마 전 파주 NFC에서 열린 골키퍼 자격에 대한 강의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죠. 코치가 무늬만 코치 역할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따로 특별한 비결이라기보다는 꾸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도 매일같이 아침에 헬스장에 가서 10km씩 뛰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코치님이 생각하시기에 골키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진혁)
=음, 안정감이죠. 골키퍼에게 중요한 건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은 아무래도 안정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골키퍼가 골문을 안정적으로 단속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피곤해지거든요. 그다음이 뭐 기본기가 되겠죠. 그중에서도 또 단연 캐칭이 중요하겠고요.
- 후반기를 진행 중인 우리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 지금 우리가 딱 절반을 걸어왔는데 혹시라도 여기서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뭐 앞으로도 잘 되겠지.’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과감히 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고 분명히 또 위기가 찾아올 것이란 말이죠. 지금부터 한 경기, 한 경기 집중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후반기 승점 관리를 잘해서 우리가 목표하는 아니 그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있게 조금만 더 힘내자 선수들! 인천 유나이티드 파이팅!
-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 제가 인천에 온지도 이제 2년째 인데, 사실 처음에는 많이 생소하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한 식구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 정도로 팀에 애정도 많이 생겼고요. 팬 여러분도 다 같은 한가족이라 생각합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우리 인천 유나이티드를 위해 열렬히 응원해주십시오. 그럼 우리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 이기는 경기로 그에 대해 보답할 것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감사합니다.
- 질문이 모두 끝났습니다. 김현태 코치님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이렇게 인터뷰에 협조해주셔서 정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시즌이 끝날 때까지 우리 선수들 잘 지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오랜만에 인터뷰했는데 대답을 잘 했나 모르겠네요?(웃음) 정말 너무 유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즌 동안에도 좋은 성적을 위해 선수들을 더 열심히 지도하겠습니다. (악수를 청하며) 인터뷰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약 1시간 40여분에 걸친 오랜 시간동안 김현태 코치님께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으시며 진지한 자세로 정성껏 인터뷰에 임해주셨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이렇게 UTD기자단과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현태 코치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음 주인공은 명진영 코치입니다. 다음 인터뷰 기사도 기대 많이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글 = 이상민 UTD기자 (power1360@hanmail.net)
사진 = UTD기자단 사진 자료실, 김현태 코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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