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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0일 어느 인천 유나이티드 팬의 일기

590 UTD기자단 뉴스 UTD기자 최하나 2013-04-27 1873

2013.04.20 인천 유나이티드 3-1 전북 현대 모터스

 

오랜만에 간 축구장.

그럴 리가 없지. 누이와 오랜만에 간 축구장이 맞을 거다.

 

나에게는 4살 위 누나가 한 명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일기를 쓰는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누나가 바쁘기 때문이다. 우리 누나의 스케줄은 연예인을 뺨친다. 잘나가는 연예인은 밤샘은 밥 먹듯이 한다며? 우리 누나는 매일매일 밤샘이다. 지난 1년간은 얼굴을 본 적이 전혀 없다.

 

우리 누나는 영화감독이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암튼 영화를 찍는다고 1년 내내 장소헌팅에 시나리오작업에 연락이 안 되는 건 기본이다. 유명감독은 연출부라도 있지. 우리누이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다. 조명에 촬영에 분장에 연출부 막내부터 감독역할까지 다 한다. 다행히 연기는 안 한다. 물론 누나가 스크린에 나올 일도 없겠지만 있던 관객도 다 나갈 꺼다.

 

아무튼 우리 누나는 여자인데도 (물론 엄청난 괴력을 지녀 여자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축구를 좋아한다. 내가 막 인유를 좋아할 무렵 누이를 한 번 축구장에 데리고 갔다가 망신을 당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었다. 누이가 S석도 아닌 E석에서 어찌나 고함을 쳐대는지 그 날 먹은 치킨이 체해 주말 내내 고생했다. 그 후로 3년간 나는 전화상으로도 의도적으로 축구에 대한 화제는 피해왔다. 그런 누이가 무려 일 년 만에 나를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야, 축구 보러 안 가냐? 이번 주에 경기 있다고 버스에 붙어 있던데?”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진땀만 뻘뻘 흘리고 서 있었다.

 

‘망. 했. 다.’

 

더군다나 이번 주 경기는 전북과의 홈경기 아닌가? 솔직히 나는 인유가 잘해야 비길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인유는 원정깡패인데 이상하게도 홈에서는 아직 1승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누이가 3년 만에 가자마자 첫 승을 해서 승리의 파랑새가 되면 좋겠지만 우리 누나는 파랑새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거칠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상황을 어떡하든 모면하고 싶었다.

 

“나 이번 주에 출장 가는데?”

“야 됐어.”

 

그렇다. 우리 누나는 절대 말을 길게 하는 법이 없다. 카톡을 해도 항상 ‘ㅇㅇ’ ‘왜’ ‘ㄷㅊ’ 이런다. 이미 내 말을 씨알도 안 먹힌 거다.

 

“몇 시에 갈 건데?”

“세시 반.”

 

이로써 우리는 세시 반까지 숭의에 가기로 한거다. 어쩌다가.......

 

그리고 경기 전날. 나는 밤새 방아깨비한테 쫒기는 꿈을 꿨다. 어릴 때 철없고 멋모르던 내가 죽였던 불쌍한 방아깨비들이 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인생사 인과응보니까. 하지만 그들은 초. 록. 색 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해도 밥을 먹어도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생각을 하건 께름칙한 게 이상했다. 초록은 전북의 상징 아닌가.

 

그리고 누나와 함께 숭의에 도착했다. 오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나와 누이는 오랜만에 W석을 끊었다.

 

“노랭이, 니가 웬 일이냐?”

“아니 누나 오랜만에 왔으니까 편히 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W석 2층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창피당할 확률도 그 만큼 적겠지.

 

그리고 이 날 나는 전반 내내 숨죽이며 경기를 봤다. 전북이 공격을 하는데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나를 쫒아 다녔다. 선수들이 내 꿈을 알았다면 나를 이해했겠지.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던 45분.

 

그리고 후반전이 되었다. 이효균이 들어오자마자 두 골을 내리치는데 누이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W석 이층에는 분명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 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누나가 괴성을 지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들. 그렇다. W석 2층은 기자들과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들이 있었지....... 나는 누이 때문에 이효균의 골을 기뻐하지도 못한 채 눈치만 봐야했다. 애처롭게 누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그래도 우리는 승리했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첫 홈경기 승리인가. 사람들이 원정에서만 ‘펄펄’ 난다고 했을 때 아니라고는 했지만 얼마나 맘 졸였던지. 그런데 경기가 다 끝나고 빠져나오는데 누나가 하는 말.

 

“야, 나 이동국 팬이었잖아.”

“응?”

“팬이었던 내가 인유를 위해 콜을 외치다니. 솔직히 좀 그럴 줄 알았어. 그래도 내심 보면 응원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 우리 누나는 한 때 이동국선수를 열렬히 응원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얼빠’까지는 아니었지만 얼마나 열심히 좋아했던가. 그러니 우리 ‘얼빠’ 욕하지 말자. 언젠가는 다 넘어오게 되어있다. 마성의 매력 인유. 부디 다음경기는 지지 말기를. 그리고 누나와도 경기장에 오는 일이 없기를.

 

*본 내용은 팬의 가상일기로 사실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글 = 최하나 UTD기자(lastchristmas86@hanmail.net)

 

댓글

  • 권혁찬님, 늘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최하나 2013-04-28

  • 우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권혁찬 201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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