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도 예의도 없었다. 소통이 가능할 리 없었다.
허정무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56)은 25일 오후 9시 승기연습구장에서 서포터스를 만났다. 지난 20일 인천이 강원과 비긴 후 약 30여명의 팬들은 선수단 출입구로 몰려와 “허정무 나와”라고 외치며 항의를 했다. 이 때 허 감독을 만나지 못하고 해산한 팬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서포터와 인천 프런트가 축구경기를 한 뒤 허 감독이 경기장을 방문해 만남이 성사됐다.
인천 상공회의소 관계자를 만나 재정 지원을 부탁한 허 감독은 팬들과 만남을 위해 부랴부랴 승기 연습구장으로 달려왔다. 팬과 치킨과 맥주를 함께 먹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허 감독이 맥주를 먹을 자리는 없었다. 40여명의 팬들은 경기장 바닥에 삼삼오오 앉아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었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허 감독은 그들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했다. 바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팬은 팔짱을 끼고 "허정무 감독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5승 12무 5패로 10위. 최근 10경기에서 8무 2패를 거둔 감독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허 감독은 "팀이 부진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책임도 내가 진다. 여러분은 선수들을 응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인천은 시작부터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 감독이지만 돈을 벌어오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며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팬들의 날선 질문은 계속됐다. 허 감독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낮은 톤으로 답했다.
그는 "6강에 오르기 위해서는 김정우·김남일·이천수와 같은 선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구단 재정으로는 데려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에 한 여고생 팬이 "듣고 있자니 감독님은 왜 선수 핑계만 하느냐"고 따졌다. 침착하던 허 감독도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나는 선수 탓하는 것을 싫어한다. 분명하게 '선수가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고 말했다. 기사를 다시 읽어봐라"며 "말 싸움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김석현 부단장은 서둘러 팬들의 질문을 끊고 자리를 접었다. 허 감독은 "(팬들과 만남이) 청문회 같았다"며 아쉬워했다.
한 여고생 팬은 허 감독을 만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 “허정무 X놈아 선수탓한거 맞자나” “나 솔직히 이말하면 진짜 나빠보일 수도 있는데 허정무나랑 얘기할 때 열받아서 좋았음” “솔직히 오늘 아버지뻘되는 허감독한테 공격적으로 말한건 내 잘못 반성하고 있음 ㅋㅋ” 등의 멘트를 두서없이 남겼다. 현장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1년 전 허정무 감독은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그는 한국축구역사상 처음으로 원정에서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인천 지휘봉을 잡은 뒤 "인천에서 유쾌한 도전"을 천명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허 감독의 도전은 유쾌하지 못하다. 이튿날 허 감독은 일간스포츠와 전화 인터뷰에서 “다 내 잘못이지 무슨 탓을 하겠냐”며 말을 아꼈다.